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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길 (2015-08-19 09:49:12)
조선은 왜 망했나 HIT : 361
조선은 왜 망했나

배연국 논설위원
세계일보|배연국|입력2015.05.20.

공직자 부정부패로 ‘망국의 길’ 걸은 조선
온갖 부패로 얼룩진 대한민국과 닮은꼴

'부패한 나라는 망한다. 조선은 부패했다. 고로 조선은 부패로 망했다.'

이런 삼단논법이 패망의 조선에도 성립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믿는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수많은 사료와 증언이 뒷받침한다. 진실은 때론 가혹하고 아픈 법이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한 토정 이지함은 한 통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린다. "전하! 북방의 여진족이나 남방의 왜구 무리가 2만∼3만명만 쳐들어와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목숨을 내건 늙은 선비의 절창이었다. 토정은 명확한 근거도 제시했다. "백성들이 원통해하며 근심에 잠긴 지가 한두 달도 아니고, 누구 하나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조선은 14년 후 임진왜란으로 멸망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다.

망국의 위기를 부른 원인은 다름 아닌 관리의 부패였다. 그중에서도 군역이 가장 심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에 고향을 뜨자 관리들은 부족량을 채우기 위해 아이와 노인까지 군적에 올렸다. 심지어 나무와 바위, 개, 닭을 사람으로 둔갑시켜 군역을 물렸다. 백성에게서 나온 고혈의 상당 부분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관리들의 학정과 탐욕은 갈수록 심해졌다. 1803년 가을엔 한 백성이 칼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그것'을 들고 관청으로 달려간다. 문지기가 막아서자 아내는 땅을 쳤다.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 있어도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남편이 자해를 한 이유는 군역 때문이었다. 죽은 아버지와 생후 사흘 된 갓난애를 군적에 올려 재물을 빼앗아가자 막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그 참상을 '애절양'이란 시에 담았다. 정약용은 "온 세상이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고 탄식했다.

선각자들의 경고에도 부패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왕과 세도가들은 돈을 받고 관직까지 내다팔았다. 통상 2∼3년이던 관직의 재임기간은 구한말엔 3개월로 줄었다. 1년에 5번 수령이 바뀌는 곳도 수두룩했다. 수령을 자주 바꿀수록 뇌물을 더 많이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사 자리는 10만냥, 일등 수령 자리는 5만냥으로 공정가격이 책정됐다. 수령은 뇌물로 바친 돈을 메우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짰다. 관리들은 무기마저 고철로 내다팔았다. 조선의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백만 대군이었지만 실제론 군사도 무기도 텅 비어 있었다.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 관료들의 부정행위는 마치 히드라(머리가 아홉 개 달린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의 머리 같아서 아무리 잘라내도 끝이 없다"고 적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미국의 퍼시벌 로웰은 "관리의 수는 적으나 그들이 곧 나라의 주인이고 나머지 사람은 인구를 늘리는 역할만 할 뿐이다"라고 개탄했다. 이런 지경이니 누구인들 나라 지킬 마음이 생기겠는가.

오늘이라고 달라졌는가. 참모총장에서 말단 군무원에 이르기까지 군사기밀을 팔아먹고 엉터리 무기를 사들인다. 정치인은 '부패 백화점'의 단골손님이다. 온 나라가 흙탕물 범벅이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온전하길 바랄 수 있나.

임란의 병화에서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도 조선이 삼백년을 더 존속한 것은 기적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느님이 도우신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부패한 조선은 같은 일본에 결국 패망했다.

맹자의 경고가 가슴을 저민다. "나라도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다." 작금의 부정부패는 우리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짓이나 다름없다. 하늘의 기적은 맹세코 두 번은 없다.



조선은 왜 망했나 (Ⅱ)
양반 군역•납세 회피 나라 허리 양인 몰락
지도층 도덕적 의무 국가의 덕목 삼아야

이국의 청년은 캄캄한 절벽을 마주한다. 꽉 닫힌 마음의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수만리 태평양을 건너온 그였지만 조선의 현실은 바다보다 아득했다. 청년은 두 손을 모았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툭 떨어뜨려 놓으신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1885년 스물여섯에 조선 땅을 찾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문이다. 청년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근 조선 백성은 어둠 그 자체였다. 왜 조선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손길에 의심하고 화부터 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한 번도 그런 선의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반에게서 수탈만 당한 백성으로선 의심은 당연한 방어본능이었다.

원래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꾼 나라는 이런 사회가 아니었다. 정도전은 사대부가 전제왕권을 견제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추구했다. 그러나 거기엔 빠진 것이 하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었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조선 지배층에는 없었다.

지배층인 양반은 사회적 지위만 누릴 뿐 의무와는 담을 쌓았다. 가장 심한 대목이 군역이었다. 양반은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다. 말단 자치조직인 향청 간부로 이름만 올려도 부계, 모계, 처계의 구족(九族)이 면제를 받았다. 면제의 공백은 힘없는 양인에게 수십 배의 고통으로 돌아갔다. 양반은 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농사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다. 이유 없이 매질하고는 재산을 뺏는 일이 흔했다. 이런 풍토에서 노동으로 부를 축적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돈을 주고 양반 족보를 사들였다. 양반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에 전체 인구에서 10% 남짓이던 양반 비중은 1858년 대구지역의 경우 50%로 높아졌다. 납세와 병역을 담당하는 양인은 20%에 불과했다. 국가의 허리인 중산층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세금이 걷히지 않자 왕실은 공명첩을 발행해 관직까지 내다팔았다. 양반 비중은 급기야 90%로 치솟는다. 국가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다.

천년제국 로마는 조선과 달랐다. 왕과 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무장했다. 공공봉사와 기부는 지도층의 의무이자 명예였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에도 앞장을 섰다. 가뭄이 들면 공공수로에 앞서 부유층의 수로부터 끊었다.
국가가 위난에 처하자 지도층의 의무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한니발 장군과의 16년 전쟁 동안 목숨을 잃은 최고지도자는 13명에 이른다. 원로원의 귀족 비중은 건국 이후 500년간 15분의 1로 줄었다. 전쟁으로 귀족들의 희생이 컸던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한다. 특권층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난 조선사회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이 둘의 차이가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

도덕 불감증은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하다. 장관과 정치인들은 병역기피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사회적 책무는커녕 자기 이익만 앞세우는 공직자와 지식인들이 도처에 숱하다. 도덕의 위기이자 국가 존망의 위기다.

지도층이 의무를 회피하는 공동체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그런 풍토라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은 기대하기 힘들다. 애국심은 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시멘트와도 같다. 접착제가 없으면 구성원은 모래알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접착제다.


조선은 왜 망했나 (Ⅲ)
숱한 외침 때마다 어김없이 의병 등장
애국심에 불붙일 공동체 정신 절실

조선은 지도층의 부패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실로 멸망했다. 앞서 두 번의 칼럼에서 지적한 내용 그대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남는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일은 세계사에 드문 현상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존속기간으로 치자면 매우 희귀한 일에 속한다. 중요한 점은 그런 조선이 외세에 무너졌고 우리 민족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은 930여회의 외침 속에서, 중국이라는 대제국을 머리에 이고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한마디로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우리 핏속에는 애국심이란 DNA가 있다. 그것은 반만년 역사를 관통하는 배달민족의 정신이다.

중국을 무너뜨린 서양 군대가 놀란 것도 우리의 애국심이었다. 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최신 군함 5척을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강화도에서 외적에 맞선 이들은 조선 팔도에서 소집된 호랑이 사냥꾼들이었다. 무기라고는 흰 무명옷에 낡은 구식총이 전부였다. 대포소리가 고막을 찢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포탄과 총알을 맞고 바다 위로 꽃잎처럼 떨어졌다.

당시 참전했던 한 미군 소령은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 낡은 총을 쏘다가 총알이 떨어지면 돌을 던졌고 돌이 떨어지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병사들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350명이었고 미군은 겨우 3명이었다. 미군은 대승을 거두고도 격렬한 저항 앞에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5년 앞선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이름 없는 백성들의 반격에 쫓겨났다.

애국심은 국난의 위기 때마다 왕조를 가리지 않고 빛을 발했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저항정신이었다. 고려 왕실이 대제국 몽고에 맞서 38년간 강화도에서 버틴 기저에는 백성들의 피 끓는 저항이 있었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극기 하나만으로 총칼에 맞서고,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 역시 의병 정신의 발로였다.

애국심은 대한민국에서도 환생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은 춘천 부근에서 난생 처음 탱크와 맞닥뜨린다. 젊은 장병들은 화염병을 품에 안고 탱크 밑으로 뛰어들었다. 해외에 있던 ‘의병’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학생 642명은 전쟁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조국으로 돌아왔다. 세계 역사상 처음 있는 재외국민의 참전이었다. 이들 중 135명은 조국의 산야에서 목숨을 잃었다. 학생 의병에게는 그 흔한 군번조차 없었다. 애국심이 전부였다.

배연국 논설위원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중국을 제패한 몽고와 청나라가 왜 유독 우리나라만은 없애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분명히 우리를 멸망시킬 힘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대제국을 유지하려면 필연적으로 많은 군대와 비용이 수반된다. 가령 한반도의 왕조를 없애고 자기 땅으로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치자. 그 후에 계속 독립투쟁이 일어난다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왕조를 없애고 직접 통치하는 게 나을지, 왕조를 놔두고 조공국가로 삼는 게 나을지 통치 비용적인 관점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저항정신이 부담스러웠던 까닭이다.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 22일 만에 관객 5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연평해전을 찾는 이들이 늘고, 이순신의 활동을 그린 ‘명량’이 사상 최고의 관객 기록을 세운 현상의 이면에도 애국심이 자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애국심에만 만족할 수 없다. 애국심은 국민을 결속하는 귀한 정신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강대국으로 이끌어주진 못한다.

로마, 영국,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는 지도층의 청렴과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애국심의 DNA에 불을 지피자면 그런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 한 세기 전 조선 멸망의 교훈을 오늘 가슴에 새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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