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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림의 불꽃 같은 삶 HIT : 1504


이화림의 불꽃 같은 삶


평양 출신.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평양의 유치원 교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평양의 학생들로 조직된 역사문학연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성진•안주 등지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金九)가 이끄는 애국단(愛國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중국 광주(廣州)에 있는 중산대학(中山大學) 법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35년 늦가을 광주에 온 윤세주(尹世胄)를 만나, 이듬해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당의 부녀국에서 의료보건사업의 책임을 맡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중경(重慶)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3월계림(桂林)으로 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朝鮮義勇隊 婦女服務團)의 부대장(副隊長)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41년 여름에는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1942년 3월경 화북조선인민간부훈련반(華北朝鮮人民幹部訓練班)에 입학하여 중국혁명사와 중국공산당사를 배웠으며, 졸업 후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교장 武亭) 후원 사업을 전개하였고, 1943년 봄부터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일하였다.
1944년 4월연안(延安)으로 들어가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金枓奉)의 휘하에서 자료 수집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해방 후 오랫동안 중국 대련(大連)에서 살았다.


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몽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 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이루지 못했어도
혼비백산한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 게다
석 달 뒤 상하이홍구 공원
물샐틈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삼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사진설명>                 
▲ 이화림 애국지사가 다닌 손문이 세운 중산대학은 조선인들이 많이 다녔다.

● 이화림 (李華林, 1905.1.6 - 미상)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으로는 이봉창, 윤봉길, 이화림이며 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3•1운동 참가 후 평양 일대의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1930년 상해로 건너가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이봉창 이 동경에서 던진 수류탄은 이화림이 상해에서 만들어 다리 사이에 채워준 주머니에 담아 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당시에도 김구의 지시로 윤 의사와 위장 결혼, 함께 현장에 접근하여서 했다는 것이다. 거사 당일 두 사람이 김구 앞에서 선서를 하기까지 했으나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 수는 없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윤 의사만 혼자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거 이후 이화림은 중산대학에서 법학을 두 학기 공부하였고 다시 의학부로 전과하여 간호사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공산당계열의 태항산 무장항일세력에 참가, 김학철 등과 같은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0년에 낙양(落陽) 부녀대장, 1941년에 태항산 부녀대대장, 1944년 연안의대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하얼빈시에서 의사 생활을 하였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북경 교통부의 위생부 간부 등을 지내고 1979년 공직생활을 마친 후 요령성 대련시 정부 시찰원 (고문직)직책을 갖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헌 윤봉길 평전> 김학준 저 p368 -
김학준 교수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 <天池> 문학잡지사 부총편(부주간)으로 있는 장지민 씨가 윤봉길 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회와 조선일보사에 보내온 이화림에 대한 자료를 인용 위와 같이 밝혔다. 이 자료를 조선일보는 1991년 12월 7일 자로 다루었으니 꽤 오래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중국 여행이 흔해 상해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윤봉길 의사의 유적지인 홍구공원을 들르게 된다. 현재는 중국작가 노신(魯迅 ‘루쉰’을 기념하여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곳에 서면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던 그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히로히토 천황 생일(천장절)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일대의 파문을 일으켰는데 이 일로 장개석(장제스) 총통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을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이화림은 상해로 건너가기 전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조직한 역사문학연구회에 가입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의 오빠 둘은 이미 중국에서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오빠들의 영향도 있어 그가 평양에 머무르지 않고 국내보다는 비교적 활동영역이 넓은 중국행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 온 이화림은 상해의 번화한 모습 속에서 한없이 작은 조선의 실체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괴로워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격과 무술을 익혀 신체 단련을 하면서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찾아가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게 된다. 처음에 김구는 이화림이 여성이라는 점과 또 간첩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선뜻 대원으로 받아 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강인함과 적극성에 김구는 이화림을 윤봉길과 이봉창과 함께 대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폭탄을 무사히 운반하도록 도운 이도 이화림이었다. 이봉창에 대한 인상을 이화림은 이렇게 말했다.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콧마루, 갸름하면서도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퍽이나 패기 있고 당차 보였다. 김구 앞에서 선서를 끝내고 일본으로 떠난 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거사 며칠 후 중국 신문에 “한인 이봉창 일황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라는 제목 아래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글을 보고 그의 장렬한 죽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러한 이화림(일명 이동해)의 이야기는 <백범일지>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김구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민족운동방식의 노선 차이를 느낀 이화림이 김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떠났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봉창이 “김구 앞에서 선서” 한 사실이나 이화림이 ‘이봉창의 거사’ 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비밀 조직인 애국단의 특성상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발설키 어려운 증언이라고 본다.
상해를 떠나 광쩌우로 온 이화림은 중국혁명의 대부인 손문이 광동혁명거지를 창설할 때 국민혁명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중산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당시 중산대학에는 조선학생 30여 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다수 한인이 수학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지사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진광화, 노민, 이정호, 이동호 등과는 조선인용진학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연락을 받고 남경으로 가서 입당하여 부녀대의 임무를 맡게 된다. 부녀대의 임무는 항일선전선동 사업으로 조선인 여성들을 조직, 지도하며 중국여성들과의 연합 통일 전선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이어 1938년 10월 10일에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의 창설이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좌파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연맹 산하의 무장집단으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군사조직이었다.
민족의 반일역량을 총결집하여 국외에서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닻을 올린 조직이다. 규모는 100-300명 수준이었지만 대원들의 지적, 언어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 때 정예집단이었다. 1939년 3월 조선의용대 본부의 소환령을 받고 계림으로 간 이화림은 부녀복무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주로 후방에서 항일선전사업을 전개하였다.
1940년대부터 제3지대와 제2지대는 화북으로 이동하였는데 낙양에서 2-3개월 부대정비와 대원 재훈련기간을 거쳐 1941년부터는 태항산 항일혁명근거지로 이동하였다. 근거지로 삼은 태항산은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악지대로 곡식이 나지 않는 곳이었다. 주식은 강냉이와 겨를 섞어 먹었고 이마저 부족할 때는 태항산의 돌미나리를 뜯어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였다. 또 미나리 말린 것과 겨를 섞어 만든 떡, 도토리 가루,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를 뜯어 목숨을 연명하였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 돌미나리
한두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는구나
이화림은 부녀대를 이끌며 도라지 타령을 개사해 만든 “미나리타령”을 부르며 조국광복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거친 산골짜기나 긴장감이 도는 군사조직에 몸을 둔 탓인지 이화림은 여자라기보다는 남성다운 면이 컸다. 김학철은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이화림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한, 속이 옅은, 경박한 편이었으므로 덩달아 이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러나 뒤집으면 이화림은 일부러 남자들에게 냉정했는지 모른다. 남자들이란 조금만 호의를 보여도 다른 생각을 먹기 쉬운데 군사조직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시정의 여자들처럼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화림은 이집중이라는 조선의용대 총무부장과 결혼했으나 1939년 계림에서 만난 적이 있는 김학철 씨의 회상으로는 이미 이때부터 이화림과 남편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2년 전 이화림은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일하다가 1945년 1월 혁명사업의 하나로 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정으로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는다. 해방 후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의사로, 북경에서 교통부, 위생부 간부를 하다 은퇴하였다.
이화림 같은 항일 전사들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 출신들이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숨 바쳐 쟁취한 조국은 아쉽게도 남북으로 갈려 있지만 과거 한목소리로 항일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발굴하여 그 정신을 다시 조명해야 할 것이다.

<더보기> 윤봉길(尹奉吉, 1908.6.21~1932.12.19)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홍구공원을 답청(踏靑)하며-
처처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 일성으로 맹세하세.

이러한 두 편의 시를 남긴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성의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 찬 편지를 남긴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더욱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가서 그해 겨울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천장절 기념식 및 전승 축하기념 식전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장교와 고관을 처단하였다. 5월 25일 상해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오사카로 호송되어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네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니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자료출처 : 수원일보



1938년 창립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산전수전 다 겪은 항일투사들이 한 곳에 모였다



김구 선생이 감춘 '여성투사 이화림'을 아십니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본문 중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보냈다는 편지, 이 글은 읽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조마리아 여사나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뒷바라지와 성원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은 수많은 어머니와 아내의 이와 같은 희생과 눈물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여성의 희생이나 아픔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자현 의사처럼 여성의 몸으로 어지간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했던 여성들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감춰진 여성 투사들의 일대기
몇 년 전, 남자현 의사에 대한 짧은 글을 읽으며 그리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이 궁금했었다. 자료를 찾았으나 알 길이 없어 막연히 궁금한 채로 잊어버린 터, <숨어있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알게 된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이 반갑기만 하다.

독립운동사에 대해 어두운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 책 역시 이 두 의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보냈다는 편지도 소개하고, <백범일지>도 인용한다. 바로 이화림이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이화림은 김구 선생이 이끌었던 한인애국단의 한 사람으로, 김구 선생이 주도한 의거들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녀는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독립군인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5살에 상하이로 넘어간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 그곳에서 사격과 무술을 배운 후 일본 밀정들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1932년 3월 2일)는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일본거류민단장을 즉사시키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외에도 몇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한 '상하이 점령 축하식'이 열리던 전날,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가장하고 기념식이 열렸던 홍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고 한다. 감시가 삼엄했던 당시 이화림의 역할은 컸다.

앞서 몇 달 전, 일본에서 미완의 거사(1932년 1월 8일)로 끝난 이봉창 의사를 도운 것도 이화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왜 우리에게 잊히고 말았는가.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백범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었던 이화림의 존재는 컸다. 이회림은 재정난을 겪고 있는 임시정부를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활동 경비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밀정 처단이나 연락활동 등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김구 선생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던 그녀가 테러만으로는 조선의 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백범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저우로 떠났으니 백범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까? 더구나 이화림이 백범이 싫어하는 좌익계열의 항일운동 기지로 갔다는 점도 이화림을 회고록에서 지우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본문 중에서

책을 통해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도운 이화림이 광저우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항일투쟁과 조선족들을 위해 산 의로운 삶 그 말년을 접할 수 있다.

몇 년 전 궁금해 했던 터라 그 어떤 주제보다 반갑게 읽은 글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쉽다. 몇 페이지 분량으로 이화림의 삶을 아주 조금 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쉬움이다. 이렇게나마 이름이라도 기억할 수 있게 해준 책이 고마우면서도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2013년 말까지 독립유공 포상자는 외국인 46명을 포함해 총 1만3403명. 이 중 여성은 22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화림처럼 자신의 삶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음에도 잊힌 여성투사들 그들을 좀 더 풍성한 자료를 통해 접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분들에 대한 후세인들의 당연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역사책, 우리는 왜 읽어야 하나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의 부제는 '구한말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이야기'. 지난해 연말에 출간된 1권(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까지)처럼 우리에게 대체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

개인적으로, 표면적으로만 조금 알고 있던 제주 4•3사건이나 여순반란 사건, 이승만의 다양한 얼굴과 영향력 등 우리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건들을 자세히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외에도 책은 비운의 의사 백정기, 조선인의 피를 빨아먹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 조선 민중에게 '악마의 소굴'로 불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후 경성 시내에서 일본 경찰 1000여 명과 대치하다 자결한 김상옥 의사,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의사 등을 소개한다.

또 이들을 후원하거나 결정적 역할을 한 구한말 대신 출신 김가진을 비롯하여 일제와 이승만에 맞선 조선의 마지막 선비 김창숙, 한국인 독립 운동가를 토굴에 숨겨 살려준 일본인 교수 미야케,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문화재를 지킨 의로운 사람들의 행적들을 다룬다.

동시에 우리 문화재사에서 절대 잊으면 안 될 악랄한 문화재 약탈범 3인방을 비롯하여 친일파에서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신한 이명세의 추잡한 인생과, 한국 현대사를 먹칠한 잔인한 파렴치범들과, 이승만의 잔학한 진실 등을 다룬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배경이 되는, 1950년 12월 19일에 흥남부두에서 많은 피난민들을 싣고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이야기는 영화에 대한 감동의 기억으로 가장 먼저 찾아 읽은 이야기다.

내 주변에는 이처럼 역사관련 책을 이야기하면 "또 그 복잡한 역사책이냐?"며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라 반문하면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다가, 그 사건이 그 사건 같아 혼동 된다"라는 것이다. 실은 그간 역사 관련 책을 그래도 좀 읽었다는 필자가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필자가 이 두 권의 책을,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다. 최근 2~3년 동안 읽은 역사 관련 책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으로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보탠다.

자료출처 : 오마이뉴스
 홍산문화(紅山文化) 1
가림성
2015/10/27
 日, ‘한민족 뿌리’ 날조 민낯을 보여주다
가림성
2014/10/03
(2015-04-22 05:32:26)  
가림성
1905~1920년 사이에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북한의 여러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통하여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운동 그리고 새로운
학문과 신앙을 키워왔다.
그들 중에는 한국에서 중요한 정치, 경제, 교육계에서는 물론 종교계에서 활동한
여성들이 있다, 바로 김활란, 박마리아, 양윤영, 이화림의 삶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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